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공화국(프랑스 제1공화국)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프랑스 혁명]] 이전의 [[앙시앵 레짐]] 하에서 고위 [[성직자]]들은 제1신분으로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는데, 이는 혁명 세력이 [[가톨릭 교회]]를 청산 대상으로 간주하는 원인이 되었다. 그래서 혁명 이후 수립된 [[프랑스 제1공화국]]이 [[라이시테|급진적인 정교분리 정책]]을 실시하자, [[교황]] [[비오 6세]]는 혁명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, 혁명 정부에 협조하는 [[성직자]]들을 [[파문]]하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.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의 입지를 더욱 악화시켜, [[자코뱅]] 정권의 [[로베스피에르]]는 [[교황청]]의 입장을 따르는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[[단두대]]에서 [[처형]]하는 [[공포정치]]를 폈다. [[테르미도르 반동]]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처형된 이후에는 공포정치와 같은 과격한 탄압은 없어졌으나, 혁명 정부와 교황청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. 마침내 [[1798년]] 2월에 [[프랑스 정부]]는 [[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]]가 이끄는 [[프랑스군]]을 파병하여 [[로마]]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. 그리고 베르티에는 비오 6세를 프랑스로 압송하고 [[교황령]]의 폐지를 선언한 뒤, [[괴뢰국]]을 수립했으니 그 나라가 바로 '로마 공화국'이었다. 같은 해 11월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[[나폴리 왕국]]의 [[페르디난도 4세]]가 로마에서 프랑스군을 축출했으나, 바로 다음달에 프랑스군이 탈환하여 교황령 부활은 수포로 돌아갔다. 이후 비오 6세는 프랑스로 압송된 이듬해인 [[1799년]]에 죽었고, 루이지 바르나바 키아라몬티 [[추기경]]이 [[콘클라베]]에서 교황 [[비오 7세]]로 선출되었다. 비오 7세는 교황령을 되찾기 위해서는 나폴리보다 강력한 반혁명 세력의 도움을 필요하다고 파악했고, [[러시아 제국]]과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의 지원을 받아 같은 해에 로마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교황령을 부활시키는데 성공했다. 2년 뒤인 [[1801년]]에는 당시 프랑스의 통령[* [[고대 로마|로마]] [[집정관]]을 뜻하는 '콘술(Consul)'에서 유래한 직위로, [[프랑스 대통령]]과는 다르다.]이었던 [[나폴레옹]]과 정교 협약을 맺음으로써 교황령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고,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탄압 또한 중지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